가능한 사랑 보기.
반질반질 잘 닦은 사랑이야기.
이 이야기를 오랫동안 준비했다는 얘기를 sns 어딘가에서 본 거 같았는데 제작한다고 얘기를 몇년 전에 들었는데 노동자 얘기 한다 그래가지고 또 버닝같은 거 들고올까봐 짜증부터 났었다.
나는 버닝을 싫어하고 밀양을 좋아한다. 버닝은 그냥 싫다못해 이걸 좋다고 하는 사람들마저 싫을 정도다. 은교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랑 같은선상으로 본다 아무튼 너무 싫다 싫은 얘기는 다음에 하고.
캐스팅은 전도연 설경구였는데 이창동 전도연 설경구 -> 이 아홉글자는 좀 말이 달라지지.
그리고 정말 달랐다.
이창동은 이제 어떤 경지에 오른사람 같았다.
집오는 길 버스안에서 이 영화의 제목이 왜 [가능한 사랑] 인지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 누군가를 인간 대 인간으로 사랑하기조차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호석을 움직이게 하는건 그 어떤 것도 아닌 사랑이고, 이 불가능한 세상속에서 꼿꼿하게 가능한 사랑을 말하는 호석 때문에 눈물이 났다.
영화 도입부에 십계명이 나오면서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 라는 문구가 나온다. 단순하게 남의 남자, 남의 여자, 돈, 이런 것들을 탐하지 말라라는 말이라기엔, sns와 스마트폰으로 우린 요즘 손쉽게 타인의 삶과 정서까지 탐하고 있는 세상 아닌가. 예지는 미옥과 호석의 삶과 그 고통을 탐하고, 스스로 '사랑하려고 한다' 라는 말까지 해가며 미옥을 이해하고 그녀의 삶에 관찰자가 아닌 동지로 이해받고 싶어하지만 실패한다. 이 태도가 너무 시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시선에서 나또한 벗어날 수 없어서 보는 내 뒷통수가 시큰했다.
이 영화는 네명의 인물에 대한 계급이 정말 촘촘하게 나뉘어져 있다. 같은 해고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외면받은 호석, 마스크 공장에서 몇 안되지만 정규직 노동자로 노조까지 설립한 미옥, 부촌 출신이지만 유학 내내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했던 예지와, 그의 남편인 상우는 예지와의 결혼 관계에서도 명확하게 상하관계가 보여진다. 영화를 보는 내내 미옥과 호석은 '제가' '저는' 이라고 자기자신을 말하는 데 비해 상우는 '내가' '나는' 이라고 말하는 것부터 느껴졌다.
그리고 예지는 '저는' 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창동은 좀 피곤한 얘길 하면서 사랑을 꼭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세상에서 몇 안되는 로맨티스트가 이 양반인 거 같다 멜로하면 참 잘할 거 같은데 하긴 밀양은 멜로긴 한데 좀 피곤하다.
그리고 이 영화또한 마찬가지다. 로맨스가 아닌 멜로를 하는 영화감독이 아직 실존한다는 것은 인생의 행운이다. 멜로 보고싶어서 그동안 1960년대 영화 뒤져봤는데 이 할아버지가 2026년에 들고나왔네.
극중에서 상우는 본인의 결혼을 식구들이 반대했던 이야기, 장인 어른의 세탁소 이야기 등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예지의 이야기를 무용담 들려주듯 하는데,
누군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빼앗기며 상처받고 살아와 켜켜이 묻어두던 분노들을 감정표현에 서툴러서 쉽게 드러내지 못하고,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싫어하며 너무 꼿꼿하다 못해 부러져버린 기성세대 남성인 호석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망가졌고 힘들단 얘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들킬까봐 너무 무서워 한다.
난 이 포인트가 정확하게 사랑이 가지고 있는 낭만이라고 생각한다.
호석이 예지에게는 털어놓을 수 있었던 것, 그건 연대도 아니고 고마움도 뭣도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나한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니까 하는 거다.
호석은 극 중 내내 썩은 얼굴(ㅋㅋㅋ)을 하고 아무말도 하지 않지만, 미옥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준다. 예지는 자신을 데리러 온 상우에게 고맙다고 애교를 부리며 감사함을 전하지만, 미옥은 자신을 데리러 오는 것을 깜빡 잊고 잠든 호석에게 군기가 빠졌다며 볼멘소리를 한다. 같은 회사 식구들과 나중에 마당에서 술을 마시고 싶어 열심히 대리석을 깎아 만든 테이블도, 결국 실패로 돌아가 산 자들에게 외면당했을지언정 부수지 않은 이유. 미옥이 고추도 말리고 이불도 말리고 마지막 장면은 그 테이블에 앉아 함께 달도 본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혼자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이것저것 짚이는 대로 악다구니를 쓰는 것도, 조용히 곁에서 지켜보면 눈물 흘리는 미옥의 시선과, 그것을 담아내는 예지의 시선이 있다.
미옥은 아마도 상우를 멋진 남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연애를 하고 싶었을까? 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 영화에서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가능한 사랑] 은 상우와 미옥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게 중요하지도 않고. 상우의 전화 통화, 그리고 차원이 달라진다는 말. 먹고 사는게 가장 중요한 노동자에게 저 말은 기만으로 느껴졌을 거다, 노동조합을 찾아온 예지의 옷차림처럼. 예지처럼 다가오지 않는 상우에게 아마도 미옥은 ""동질감"" 을 느끼고 싶었을 거다. 기생충에서 끊임없이 박사장에게 "그래도 사모님 사랑하시죠?" 하고 여러번 되묻는 기택처럼, 나체 수영을 "자유" 라고 말했던 상우에게 미옥의 나체 수영은 "자유" 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마저 빼앗으려고 했던 상우, 가진 것 없는 미옥의 작은 자유마저 빼앗으려고 한 상우에게 환멸이 난 채로 돌아왔는데, 내 남편의 고통을 "'탐하는'" 예지의 렌즈를 보고 집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렌즈 속에서, "왜 살고있는 지 모르겠다" 는 호석의 말.
이 영화를 여태까지 왜 봤는지 나는 호석의 말로 알 거 같았다.
미옥은 그동안 예지에게 호석과의 러브스토리, 해고시위할 때의 삶 등을 이야기해줬지만 내가 아마도 보고있던 건 예지의 시선처럼 낭만으로 점철된 이야기 같았다고 생각이 들었고, 난 저 말을 호석이 뱉고나서부터 진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노조 다 좆같다고, 단결이니 투쟁이니 다 거짓말이라고.
이렇게 상처받고 너무 힘들고 왜 사는지 모르겠는 호석의 마음 속 안에서도 보름달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술을 따라주는 미옥에게 "당신이 없으니까 술이 쓰다" 며 너스레를 떠는, 아주 오랫동안 잘 닦은 사과처럼 반질반질 윤이 나는 부부의 오랜 멜로가 잔잔하게 깔린 영화.
예지는 미국 유학이 아니었으면 상우랑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얘기하지만, 미옥과 호석은 미국 유학이 아니었어도, 월미도에 뜬 달을 보면서도 찾아오는 순수한 낭만의 정점이지만 미옥은 상우의 집을 보며 "소설같다" 라고 표현하는 것, 책을 별로 읽지 않지만 상우와 예지의 사랑은 한 편의 로맨스 소설같다는 것.
마지막 장면에서 달 사진을 찍어 예지에게 보내려 했던 것도, 그리고 보내지 않은 채로 둔 것까지.
정말 얼마나좋았냐면 개 개 개 개ㄱ개개개개개 좋아서 머리가 아팠다. 2시간동안 온몸에 힘이 들어가서 긴장한 채로 본 영화가 없었어서 극장을 나오고 진이 빠지고 머리가 멍했다.
한국인이 가장 이해하기 좋은 정서를 영화화 했다고 생각한다. 어딜가나 노조는 있지만 한국의 노조정서, 그리고 보이지 않은 인간의 내밀한 계급들과 이것을 관망하는 "나" 의 건방지고 시혜적인 태도. 나는 과연 예지가 아닐까.
그리고 이 어지럽고 모두가 나에게 상처주는 세상속에서도 꼿꼿하게 사랑할 줄 아는 한 남자까지 영화의 모든 구석이 너무너무 좋았다.
난 가끔 영화를 보면서 영화가 왜 만들어져야만 하는 지에 대한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드라마도 만들어도 되고, 사실 웹툰이나 책으로도 만들어도 되는데 굳이 피곤하게 2~3시간으로 이걸 압축해서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야만 하는 이야기.
영화가 만들어져야만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만한 영화였다. 반드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6년에 하고싶은 이야기가 있는 영화는 귀하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보고싶어서 자꾸 예전 걸 찾아보고 있는데, 2026년에 이런 걸 보는게 너무 기쁘고 즐거웠기도 하다.
올해 가장 재밌게 봤다.
그래서 잊지 않으려고 남긴다.
와, 정말 깊이 있는 영화 감상을 나눠주셨네요! 🎬 전도연과 설경구의 조합이라니, 이창동 감독의 작품이 더욱 기대되네요. '가능한 사랑'이라는 제목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며 눈물이 났다는 부분이 정말 감동적이에요. 영화 속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여정이 너무 멋진 것 같아요! 💖
